FROM THE SUMM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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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우리가 아니라, 그 사이

A field note on structure

구조는 봉우리가 아니다.

봉우리는 눈에 띈다. 이름이 붙고 좌표가 박힌다. 지도의 얘기는 봉우리부터 시작된다.

가장 높은 것. 다음. 그 다음.

산을 만드는 건 봉우리가 아니다. 봉우리 사이의 선이다.


능선은 침묵한다.

이름이 드물다. 사진도 드물다. 한 봉우리에서 내려가 다시 올라가는 등뼈. 이것이 먼저 있다. 봉우리는 그 위에 얹힌다.

산의 높이는 봉우리가 정한다. 산의 형태는 능선이 정한다.

오르는 일은 짧고 격하다. 걷는 일은 길다. 고요하다. 무엇이 산을 기억에 남기는지. 다녀본 사람이 안다.


시스템도 같다.

전면이 있다. 한 번에 보이는 자리. 이름 옆의 한 줄. 거기가 봉우리다.

시스템은 전면에서 돌아가지 않는다. 한 부분과 다른 부분 사이. 흐름이 넘어가는 자리. 실패가 났을 때의 샛길.

선. 능선.

설계는 안 보이는 쪽에서 시작한다. 봉우리는 잘 보인다. 능선은 안 보인다.

봉우리만 다듬고 능선을 방치한 산은 무너진다.


오래된 도시는 능선을 먼저 따라갔다.

길을 낼 때 꼭대기를 넘지 않는다. 계곡을 따라간다. 바람이 덜 맞는 쪽. 물이 흐르는 방향. 그 선을 따라 길이 나고, 옆에 집이 선다.

런던의 구시가, 사람이 물길 따라 걷던 자국이 거리 모양에 남아 있다. 서울도 그렇다. 한강이 도시를 가른 자리에, 길과 동네가 섰다.

도시는 사이의 선이 결정했다.


관측자는 봉우리를 세지 않는다.

질문 하나를 손에 쥔다.

이것은 어디와 연결되는가.

그 질문 앞에서 지도가 그려진다.

건물이 아니라 배수로가 도시를 지탱한다.


구조를 보고 싶으면 봉우리에서 시선을 내린다. 그 밑. 그 사이. 잘 안 보이는 띠.

가장 높은 곳이 아니라, 가장 오래 붙어 있는 선.

봉우리는 사진이 된다. 능선은 길이 된다.

길을 걷는다.

— morven